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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닥터컬럼

제목

봄아 가느냐?

작성자
마인드닥터
작성일
2009.06.10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2444
내용
봄아 가느냐?

나는 사계절 중에서 봄을 가장 좋아한다. 겨울 내내 앙상한 나뭇가지들의 회색의 숲은 고요한 침묵과 휴식, 은둔의 숲이다. 화창한 봄날의 숲은 졸졸거리는 개울물 소리에 생명의 춤을 추는 신록의 숲이다. 그리고 이 소리에 앞 다투어 피는 봄꽃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내가 겪어왔던 봄들은 항상 많은 바람 때문에 부족했고 짧아서 아쉬웠다.

한식 무렵 우리 할머니 산소로 가는 산길은 항상 벚꽃이 만개해있다. 40년 전 ‘우리 손주’하며 나를 가장 예뻐했던 우리 할매가 환갑을 1년 앞두고 너무 일찍 땅속에 몸을 누우셨다. 할머니가 입관하던 그 날은 황량한 산에 푹 파인 구덩이, 목 놓아 우는 엄마, 적색의 봉분의 기억이 전부이다. 그 후 매년 2번 이상을 오는 산소 가는 이 길은 내 뒤로 10여명의 동생들의 골목대장이 되어 메뚜기도 잡던 내 어린 시절의 할머니 뵈러가던 길이 되었다. 황량하던 산길은 6살 소년과 함께 성장하면서 나무들이 아름드리 커지고 정다운 길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가며 소년은 어른이 되었고 항상 가장 앞서 산길을 올라가시던 아버님은 백발이 성성해졌다. 올해도 손수 잡초를 베시고 풀을 뜯는데 어머니를 생각하시지 않을까 싶다.

아버지의 고향은 이북의 함경남도 흥남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폐병으로 잃고 억척스럽게 아직 어린 아이들과 살아가고 있었다. 그 무렵에 6.25가 터지고 1.4후퇴 때에 어린 아들 둘과 딸 둘을 보듬고 피난선을 타고 내려오셨었다. 맏아들이 징집되어 전쟁에 끌려 나갔기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전쟁이 곧 끝나고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기에 전쟁의 포탄을 피해 피난했다. 아수라장인 피난선을 타고 거제도 피난민 수용소시절과 부산에 정착하기까지 할머니를 지탱시킨 것은 아이들을 먹여 살리는 것이었다.

맏아들이 없어 마음에 믿는 것은 둘째아들인 아버지였다. 어머니는 이 아들을 곁에 두지 못하면 불안했다. 어렵사리 직장을 구하여 서울에서 일하고 있는 아들을 불러 내리기 위해 위독하다는 급전을 거짓으로 보냈고 급히 내려오던 아들은 너무 낙담하여 낙동강철교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 결국 어머니가 매일 볼 수 있도록 부산에서 밥벌이를 해야만 했다. 전쟁 통에 학교를 마치지 못하여 배움이 짧았기에 시험에 필요한 교재를 통째로 무조건 외워서 문관시험에 합격했다. 아들은 어머니의 자랑이 되고 이제 겨우 정착을 하여 자식들을 성혼시키고 손자들도 보게 되었다. 물론 큰손주인 나를 가장 예뻐한 할머니의 가장 강한 애정표현법은 손주의 고추에 뽀뽀를 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뒷마당을 보며 앉아계시던 할머니의 모습은 한 장의 사진으로 깊이 각인되어 있다. 할머니는 또래 할머니들의 리더로 백골부대장이었을 정도로 활달하고 배포가 컸지만 혼자 계실 때에는 어린 기억에도 외로움이 언뜻 보였던 것 같다.

전쟁과 피난시절을 잘 견디셨던 할머니지만 벽에 박힌 녹슨 못에 찔려 어이없이 척추염으로 허리가 휘게 되셨다. 그 합병증으로 고열에 시달리며 패혈증 증세를 보였으나 당시 형편으로 왕진이외에는 큰 병원에 입원시키지 못했고 곧바로 돌아가셨다.

지금 아버지는 그 어머니를 생각하며 산소를 만질 것이다. 산소는 이렇게 40년 동안 월남하여 친척이 없는 우리 아버지 4형제와 그 자식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어왔고 이제 또 그 봄꽃을 피우며 우리를 맞는다. 이제는 옛날 심었었던 그 나무들이 거목이 되어 그늘을 만들어준다. 술을 쳐 드리고 절을 하고 할머니가 즐기시던 담배를 얻어드리면 제사는 끝이 난다. 어머니들은 이렇게 수십 년간 절을 할 때 자식들의 건강과 출세도 빌어 왔을 것이다. 제사를 마치면 그늘에서 제사음식을 먹으며 두런두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한다.

부모님과 작은아버님 내외의 네 사람은 이 장소의 오래된 주역들이다. 옛날의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르고 지금의 모습과 겹쳐지는데 모두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맏며느리인 나의 어머니께서도 지금 저 자리를 오래토록 참 잘 지켜오셨다. 강골인 시어머니 밑에서 며느리 역할은 순종의 세월이었다. 문관이었던 아버지의 이른 사직 후 오랫동안 같이 장사를 하며 갖은 고생을 다 하셨다. 강직하며 다혈질인 남편으로 인해 마음고생을 무던히도 하셨다. 이제는 4명의 자식과 7명의 손자들의 할머니로 조용히 늙어 가신다.

이런 상념에 젖어있는데 이제 내려갈 시간이다. 모두 할머니께 인사를 하고 벚꽃이 흩날리는 길을 내려간다. 들꽃을 꺾으며 풀벌레를 쫒아 내려가는 아이들의 뒤를 따라 내려간다. 산의 중턱의 절집에서 샘물을 마시고 한숨을 돌린다. 이제 산소길 은 거의 끝난 셈이다. 다음의 산행은 가을의 추석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매번 오지는 못하더라도 이 무렵의 산소길이 더 좋다. 봄의 아지랑이 덕분에 나른해지고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파릇한 풀들과 들꽃들이 안겨주는 생의 기운들이 반갑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느낌으로 삶의 무상함을 잊을 수 있으니 그런지도 모르겠다. 오래전부터 우리 가족에게도 오고 간 그 봄은 이제 또 가려한다. 봄아, 가느냐?

( 울산수필 2009 봄 -'37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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