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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닥터컬럼

제목

태완아, 잘 가거라

작성자
마인드닥터
작성일
2009.04.15
첨부파일0
추천수
1
조회수
2939
내용

-김태완군 어머니가 쓴 49일간의 병상일지

최근 인터넷에 돌고있는 화제의 글 중에 6살의 아들을 떠나보낸 어머니의 병상일지를 보았다.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을텐데, 99년 대구에서 황산테러를 당한 어린아이의 사건이 있었다. 독한 산에 의해 얼굴이 타버린 아이를 애끓는 심정으로 간호하며 기록하였던 글들로서 이번에 다시 인터넷에 올려지며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아이는(태완이) 50여일간 중환자실에서 너무나 힘든 고통을 당하며 신음하다 결국 저 세상으로 떠났다. 태완이는 안구가 타버리고 각막의 손상으로 시력을 상실해버렸다. 두경부의 피부는 타버려 새까맣고 입으로도 황산이 들어가 내장이 타버려 먹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중화상의 치료는 환자에게 너무 고통스럽다는 것을 나는 인턴시절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매일같이 피부가 없어져 버린 쪼그라든 몸에 들러붙은 화상거즈를 떼고 붙이는 드레싱을 할 때 화상환자는 너무 고통스러워한다. 태완이는 이 외에도 매일같이 찌르게 되는 주사 등의 검사와 치료과정이 무서워 치료진들이 들어오면 엄마에게 저 사람들 나가게 해 달라고 힘없이 졸랐다.


-백주대낮에 당한 너무나 황망하고 참담한 테러사건

누군가 학원에 가는 태완이를 골목에서 갑자기 머리를 뒤로 제끼며 아이의 눈과 입에 집중적으로
환산을 들이부은 것이다. 아이는 몇차례에 걸쳐 너무 심한 고통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범인은 아주 많은 양을 계속 부은 것으로 추정된다. 비명소리를 멀리서 들은 이모와 엄마가 달려가니 집쪽으로 기어서 오는 아이를 발견했다고 한다. 많은 국민들이 아이에게 관심과 격려를 쏟았지만 아이의 상태는 악화만 되었고 범인에 대한 수사는 오리무중이었고 결국 이 사람의 짓이라고는 볼 수 없는 범인은 검거되지 못했다.
"잘 가 태완아, 먼 훗날 다시 만나면 더 많이 사랑해 줄께"
결국 아이는 부모의 비통한 마음을 두고 저 세상으로 먼저 가고 만다.

-2000년 11월24일의 태완이 어머니 일기이다
눈을 감는다. 그 애의 모습이 눈에 박힌다. 너무나 의연했던 내 아이 태완이…. 아이 흔적이 조금씩 사라져간다. 5백원짜리 조립품으로 열 손가락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여 로봇을 만들곤 씨~익 웃어 보이던 아이, 길을 걸을 때도 잠을 잘 때도 항상 묻어나던 그 아이의 내음새…. 어제의 그 길은 그냥 그 자리에 있는데, 그 아이만 없다.

태완이의 해맑은 꿈을 훔쳐간 그는 이 세상에서 아무렇지 않은 웃음을 흘리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 세상엔 진실로 죄에 대한 하늘의 징벌은 없는 건가? 죄에 대한 벌은 어떤 형식으로든 받는다고 믿어왔었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닌가보다.
억울함보다는 어린 내 아이, 그 영혼에 대한 죄스러움이 밀려온다. 나쁜 사람 잡아 꼭 사과하게 해주겠다던 마지막 그 약속을 지켜주지 못한 무능력한 부모의 마음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길을 걸으며 언제나 웃음을 띤다. 하늘 저편에서 태완이가 엄마를 보고 있을 것만 같아 우울한 얼굴을 할 수가 없다. 그 애는 웃고 있는데 엄마인 나는 바보처럼 울고 있다면 얼마나 외로울까. 혼자 있는 것만도 두려울 텐데.
마지막 죽음을 향해 가던 태완이는 너무나 고요했다. 남은 가족의 슬픔을 가벼이 덜어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 깜깜한 어둠 속에서 아빠의 손을 꼭 잡아 자식을 눈앞에서 보내야 하는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주었다.

아빠가 말했었다. “태완아, 아빠가 나쁜 사람 잡아서 꼭 혼내줄게.”
엄마가 말했었다. “태완아 나쁜 그 사람, 꼭 태완이한테 사과하게 해줄게.”
태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힘겨운 숨쉬기가 끝나려 할 때, 의사들의 심장 소생술이 몇 차례 이어졌다. 가여운 그 조그만 가슴이 사정없이 짓눌렸다.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아이의 몸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아이의 얼굴과 몸은 점점 붉은빛으로 물들어간다. 혈액이 응고되지 않아 마치 분수처럼 솟구쳤다. 심장을 누를 때마다 기다린 듯 피는 아이를 물들게 하고…. 그 붉은빛은 무서우리만큼 고왔다.
아빠는 힘겹게 의사분의 손을 당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이상의 고통은 주고 싶지 않았다. 아빠의 두 눈엔 빗줄기 같은 굵은 눈물이 소리 없이 뚝뚝 흐른다.

엄마는 태완이의 귓가에 작게, 아주 작게 속삭인다.
“태완아, 마음 편히 잘가. 엄마도, 아빠도, 형아도 조금 있다 니가 간 곳으로 갈게.”
“….”
“태완아, 그곳은 마음의 눈으로 보면 된단다. 무서워하지 마, 무서워하지 마. 우리 태완이 먼저 가 있어. 나중에 다시 만나자. 잘 가, 잘 가, 잘 가….”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아이는 그 말을 마치자 기다린 듯 고르게 고르게 숨을 거두어갔다. 살아 있음이 그 아이에게도 고통일 것 같았던 엄마 아빠의 마음을 그 애는 알까?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기를 간절히 기도한 마음을 그 애는 알까?

마지막 가는 길. 태완이는 그렇게 사랑하는 아빠, 엄마, 형아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49일을 그렇게 있다 홀연히 떠나갔다. 누구의 잘못이든 그 아이가 견디기엔 너무나 힘겨운 고통이었다.
세월이 가면 모두들 잊혀지겠지. 그런 아이가 있었는지, 그렇게 힘겨운 시간을 보냈었는지…. 이 세상 다하는 그날 아이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태완인 그냥 잊혀진 아이가 되고 마는 걸까? 억울한 죽음만을 간직한 채.

태완이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너무 밉다

같은 부모의 입장으로서 태완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은 짐작할 수 있다. 아이의 고통을 자신이 짊어질 수 있다면 10배의 고통이라도 대신 했으리라. 아이를 그렇게 만든 범인을 찾아서 한을 풀어주고 싶은 피맺힌 눈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으며 어떤 복수를 하더라도 어찌 탓할수 있을까.

이전에 자신의 아이를 살해한 범인을 용서해 달라고 법에 탄원서를 올린 아버지에 대한기사를 보았다. 그 흉악범을 사랑으로 용서하기까지 그 아버지가 겪었던 참으로 거룩한 마음의 변화에 감동 했었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경구는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고 내 자신보다 사랑했던 아이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살해한 자에게 원한의 감정과 가슴 찢기는 슬픔을 딛고 무엇을 초월한 경지가 아닐까.

하지만 태완이 부모에 이런 말을 하지는 못하겠다. 6년이 지난 이제 태완이 부모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범인을 찾아 다니고 있을까, 피폐한 마음으로 겨우 살아가고 있을까?

태완이가 살다 간 6년

신을 믿든 믿지 않든, 우리 삶의 의미를 누구든 생각해 볼것이다. 나는 인간의 근본적인 조건들 중 호전성, 이기성과 욕심, 결국 죽고 마는 유한성 등에 대해 느껴지고 부딪칠 때 마다 우리 인간들이 불쌍하고 삶이 무상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곤 한다.

갑자기 날아온 포탄에 사지가 찢기는 중동의 어린이들, 열악한 환경에서 거친 손으로 갖고 놀지도 못하는 축구공만 만들어야 하는 파키스탄의 어린이들, 암 병동에서 파르르 깎인 머리와 창백한 모습으로 아픈 주사를 맞기 싫다고 울며 이를 달래며 울음을 삼키는 부모들, 선천적 장애자들, 맞벌이하러 나간 부모가 잠그고 간 차가운 지하 조각방에서 (엄마 ,아빠가 돌아와 문 열어줄 때까지 열 몇 시간 동안 있어야 하는) 성냥으로 불놀이하다 화염과 함께 저 세상으로 떠난 정민,정훈,경철 3남매...

신이 세상으로 이 아이들을 내 보낸 의미는 무엇인가. 왜 3남매는 그리고 태완이는 이렇게 밖에 살지 못하고 가야했을까? 시간이 지나면 그 상처는 조금 아물 수는 있어도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우리 주변에는 항상 이러한 비극은 항상 일어나고 있다.

자신이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다면?

"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잘해 주고 사랑해 줄걸..."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한 사람들의 공통한 넋두리이다. 성공한 사람이건, 아니건 죽음을 눈 앞에 둔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보면 공통점이 있다. 그 때 좀 더 투자해서 돈을 벌어둘 걸. 더 성공했어야 했는데. 라는 말보다 내 가족과 타인들에게 좀 더 잘해줄걸, 사랑한다고 표현할 걸, 미워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라고 말한다고 한다.

만약 당신이 삶의 현재를 더 소중히 느끼고 싶을 때는 자신의 죽음의 순간을 절실히 상상하고 느껴보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고 싶다면 그 사람이 지금 이 세상을 떠나버린 후의 자신이 느낄 수 있는 상실감을 경험해 보라. 상대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

내가 그리고 우리들은 내일부터의 삶은 보너스로 주어진 것이라고 감사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들은 이런 마음을 삶의 끝단에 가서야 깨닫는 것이 문제이다. 살면서 고통의 의미를 깨달으려고 노력하면 조금은 알 수도 있다. 좀 더 성찰하면 여러 날들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삶을 희망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 아이들의 죽음은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

너희들은 어른들이 지금의 어리석은 이기심을 버리고 살아가라고 꺠우쳐 주기 위해서 잠깐 왔다 간 천사들이니?
태완아, 그리고 정민, 정훈, 경철아 지금 너희들이 있는 곳은 여기보다 더 평화스러운 곳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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