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ENU

마인드닥터컬럼

제목

로봇이 나오는 영화들을 통해 본 휴머니티와 사랑의 본질

작성자
마인드닥터
작성일
2009.04.15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2990
내용

< 로봇이 나오는 영화 I -‘ 터미네이터 ’ >

먼저 다소 오래전 개봉되었던 영화지만 터미네이터가 생각이 난다.
1편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현재의 LA로 뚝 떨어진 사이보그로봇 (T-101)인 터미네이터는 미래인 2029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로봇 독재자가 이에 저항하고 있는 인류저항군 지도자 존 코너를 제거하기 위해, 정확히 말하면 존 코너의 어머니인 사라를 제거하여 존이 태어나지도 못하게, 과거로 파견된 제거자인 것이다.

슈발츠제네거는 입력된 명령만을 충실히 수행하며 인간들을 제거하고 자신이 제거될 때에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보그를 잘 연기하였다. 이 영화에서의 로봇들이 인류가 스스로를 자멸시킨 심판의 날의 핵전쟁으로 30억의 인구가 소멸한 뒤 그나마 남아있는 얼마 안되는 인류를 제거하여 로봇세상으로 만들려 하는 모습 등 지구 최후의 날의 우울한 그림을 보여준다.

인류가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과학의 발전으로 자축한 그 컴퓨터,로봇들에 의해 인류가 멸망할 수 있다는 이러한 메시지는 이 영화가 처음은 아니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기술과 연출력으로 지금까지의 어떤 영화보다도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원동력은 무엇보다 재미인데. 무려 1억달러의 제작비, 획기적인 컴퓨터그래픽 특수효과와 음악 등 수많은 기록을 세운 영화가 아닌가?

1편에서 인류의 간담을 서늘케하던 그 막강한 전투력의 터미네이터는 "I'll be back"의 여운을 남기더니 2편에서 인류의 편(우리편)으로 돌아온다. 존 코너가 어머니인 사라와 어린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보낸 사이보그(T-800)로서 자신보다 업그레이드된 액체금속 사이보그T-1000과 대결하는 것이다.

1편은 인간대 로봇의 대결구도로서 인류는 자신이 만든 기계에 의해서 멸망의 위기에 처하는 업보를 당한다. 약자인 인류는 선이고 강자인 로봇은 모조리 부숴버리는 악이다. 하지만 심판의 날을 자초한 인류는 그 안에 또한 악을 안고 있지 않는가. 인간의 악한 투사물이 로봇이듯이 말이다.

2편에서는 청의의 착한 로봇이 ( 인간을 도와주니까 의로운 로봇이다) 등장한다. 1편의 카리스마적 제거자로서 각인을 시켰던 주인공이 2편에서 우리편이 되니 영화의 재미가 더해진다. 기계의 성능은 만든자가 입력한 대로 결과가 나타나는데, 어떻게 구형 사이보그가 더 진화한 액체금속로봇을 제거할 수 있는가? 둘 다 오더가 입력된 것은 같은데 성능과 전투력의 월등한 차이를 극복한 것은 무엇일까?

터미네이터는 단순한 제거자 보다는 인간의 생존을 도와주며 구원하는 역할로서 좀 더 수준높은 존재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금속으로 만들어진 기계에 의미 있는 목적이 빛으로 스며들었을 때 이 기계는 단순한 기계를 뛰어 넘는 존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터미네이터가 인간적인 면을 보이는 다른 장면들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T-1000을 안고 용광로에 뛰어드는 모습으로 충분한 증거가 될 것이다. 기계이므로 고통과 죽음(존재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에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면 철저히 재미를 추구한 흥행대작인 이 영화가 유일하게 준비한 이 휴머니즘적 장치를 너무 무시하는 것이다.

사랑의 가장 높은 단계인 이타적인 사랑- 희생이야말로 인류의 역사와 신화에서 보듯이 가장 영웅다운 행동인 것이다. 구형기계에서의 가장 위대한 진화는 액체금속이 아니라 사랑, 희생의 속성을 가지는 영웅이 되는 것이다.

영웅이 어떤 존재인가? 조지 루카스는 스타워즈에서 루크 스카이워크라는 주인공을 내세워 고대 신화의 모티브와 주제를 차용하여 영웅의 면모를 막강한 현대적 이미지로서 보여주었다. 사실 루카스는 이 영화를 만들 때 위대한(내가 존경하므로)신화학자인 죠셉 캠벨의 저서에 큰 빚을 졌다고 인정하여 캠벨을 초청하여 스타워즈3부작을 틀어 준 일이 있다. 켐벨은 영웅의 옛이야기인 이 영화를 보고 '테크놀로지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메세지라고 하였다.

"우리의 컴퓨터, 우리의 연장,우리의 기계만으로는 넉넉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관, 참 존재에 기대어서 살아야 합니다. 영웅의 역정에서 얻는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랍니다.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하므로서,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어요.
인류는 '자기의 내부에 식인종적이고 색정적인 열정'을 지니고 있는데도 이 점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있지요. 영웅은 합리적이지 않지만 자기 내부에 운명의 실을 풀어 낼 힘이 있음을 발견하는 자입니다. 구도를 하는 사람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을 갈구하지만, 영웅은 남을 섬기는 동아리를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화의 힘>-죠셉 캠벨

캠벨의 표현을 빌면 터미네이터가 용광로에 적을 안고 떨어지는 행동은 합리가 아닌 열정도 아닌 직관이 작용한 것이다. 자기 동아리(인류)를 위한 운명의 실을 풀어낼 역할과 기회가 자신에게 있음을 직관으로 느끼고 행동한 것이다.

기계인 터미네이터는 영웅으로 진화하였다. 그렇다면 이 모든 선과 악이 같이 존재하면서 테크놀로지와 연장을 자신의 의식의 확장이라고 믿고 파국으로 치닫는 우리 인간들은 어떻게 진화를 할 것인가? 당신들에 있는 색정적 열정과 야만을 기어코 보지 않으려고 한단 말인가, 라고 묻는 로봇영웅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자기처럼 우리도 우리 내부의 운명의 실을 풀어낼 힘이 있음을 자각하라고 한다. 그것이 구원이라고.


< 로봇이 나오는 영화 II - ‘ A. I.’ >

2001년에 개봉되었던 스필버그의 화제작이다. 그의 오랜 벗이었던 스탠리 큐브릭이 생전에 영화화를 소원하다( 1969년의 동명소설을 큐브릭이 판권을 사들였다) 이루지 못한 것을 스필버그가 오랜 준비 끝에 완성한 것이다. 친구를 경애하는 마음으로 큐브릭의 차갑게 절제된 구상위에 자신의 휴머니티적 상상력을 가미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스필버그는 큐브릭으로부터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과학과 휴머니티의 결합“을 떠올렸다고 한다. 스필버그의 이 영화에 대한 애정은 자신이 직접 각본을 쓴 것으로 알 수 있다. 역시 스필버그 사단이 총력을 기울인 작품으로 촬영에 칼만스키가 음악에 존 윌리엄스가 편집에 마이클 칸이 특수효과에 루카스 사단이 공을 들인 이 작품은 제작비가 1억달러인 대작이다.

줄거리
영화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부 -영화의 배경은 북극의 빙하가 녹아 도시들이 물에 잠기고 모든 자원이 부족하지만 과학의 진보만은 엄청난 속도로 이루어진 가까운 미래. 물자의 부족때문에 음식, 환경 등 모든 것이 인공 제조물로 배급되고 가구당 출산이 1명으로 제한된 사회이다.

로봇회사인 사이버트로닉스(Cybertronics Manufacturing) 사에서 야심작으로 개발된 소년 로봇 데이비드(할리 조엘 오스몬트)는 인간과 같이 감정이 있는 로봇이다. 불치병에 걸린 외아들 마틴(제이크 토머스)을 냉동수면시키고 완치약이 개발될 때를 기다리고 있는 사이버트로닉스 사의 직원 헨리 스윈튼(샘 로바즈)과 그의 부인 모니카(프랜시스 오코너)에게 실험용으로 기증된다.

처음에 엄마인 모니카는 섬뜩할 정도로 아들과 똑같이 생긴 데이비드를 보고 놀라지만, 그녀가 사랑을 주기 시작하자 데이비드는 기계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전하는 소년으로 변모한다. 하지만 데이비드의 아들 역할도 잠시, 마틴이 퇴원해 가족 품에 돌아오자 모니카는 곰인형 '테디 베어'와 함께 데이비드를 숲 깊숙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비드는 엄마로부터 들은 피노키오 동화를 떠올리며 자신이 마법의 힘으로 진짜 인간이 되어 잃어버린 엄마의 사랑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고 여정을 시작한다.


2부. 그 길에서 데이비드는 남창 로봇 지골로 조(주드 로)를 만나는데, 살인누명을 쓴 조와 함께 로봇 처형장까지 끌려가지만 가까스로 풀려나는 등 로봇들과 그들을 혐오하는 인간들 사이에서 악몽 같은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결국 수몰된 뉴욕까지 찾아가지만, 자신에 대한 해결책은 찾지 못한다.
3부. 빙하기를 맞게 된 지구에서 다시 2천년이 지난 후 재생된 데이비드는 마침내 오랫동안 소망하던 사랑을 찾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3가지 주제로 정리하여 말씀드리겠다.

- 감정이 있는(사랑을 느끼는) 로봇의 출현
‘과학과 휴머니티의 결합‘ 이라는 스필버그의 표현에서 이 영화의 주제는 분명히 드러난다. 사랑의 본질에 대해서 로봇을 통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먼 미래에 인간들은 물자의 부족으로 인구의 증가를 인위적으로 막으면서 자신들이 부릴 로봇을 만드는 기술이 발달시켰고 모든 분야에서 로봇들이 맡은 바 제 역할을 잘 하고 있다.

입력한 프로그램대로만 명령을 잘 받고 용도가 다 하면 폐기가 되는 이 사이보그에서 인간들은 뭔가 부족한 것을 느낀다. 차가운 시대의 외로운 인간들은 로봇에게서 감정적 반응을 바라게 되고 이러한 인간의 요구에 부응하는 로봇들이 개발되어 가던 중 정말 사람과 거의 똑같은 로봇인 데이비드가 만들어 진다.

이로 인해 로봇의 존재의미는 사람에게 더 중요한 대상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제는 일방향이 아닌 쌍방향의 관계가 된 것이다. 감정을 가진 로봇은 일반 기계로봇과는 달리 사람들 사이처럼 관계 Inter Personal Relation 가 형성되는 것이다. 쌍방향은 관계지속을 위해서는 서로의 노력이 필요한데, 인간이 로봇에게 이러한 노력을 할 의향이 있는가?

그저 높은 지능의 장난감이나 잃어버린 사랑의 대체물로서 원하는데 이 감정이 있는 로봇이 주제넘게 더 많은 것을 원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영화의 초반부에서 이러한 염려가 들고 이 문제가 영화의 모티브로 작용할 것으로 짐작이 된다.

- 사랑은 대상관계가 아닌가?
엄마 모니카는 냉동실에 있는 아들을 대신하여 배달되어 온 로봇,데이비드를 보고 너무나 똑같은 모습에 전율을 느끼고 거부한다. 내 아들이 아님을 알고 기계부속품으로 만들어진 로봇임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소중한 자신의 사랑을 대체된 기계에게 주는 상황에 분노와 슬픔을 느꼈을 것이다. 어쩌면 불쌍한 아들에게 계속 가야 할 사랑이 혹시 이 로봇아이에게 가지 않을까 벌써 불안해졌을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데이비드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고 자연스럽게 모자관계가 형성이 된다. 모니카는 데이비드가 로봇임을 알면서도 사랑하게 되는데 자신의 아들에 대한 사랑이 그대로 전이된 것이다. 실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기억하고 생각하는 그 대상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이 다 그러지 않는가? 내가 사랑하는 저 이의 전체를 알 수는 없다. 당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은 당신이 알고 있는 대상이지 전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상대방의 보고 싶은 모습만 본다. 그래서 사랑의 늪에서 나오는 신혼의 시기가 지나면 자신이 보지 않았던 다른 부분들도 이제야 자꾸 보이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던 그 사람이 아닌데... 하지만 그 사람이 맞다. 당신이 몰랐던 것뿐이다. 이제 다른 부분들도 보면서 그 사람의 전부를 사랑하려는 성숙한 노력을 하는 것은 정말 바람 직 하다. 그런데, 이렇게 하여도 당신은 배우자를 완전히 알 수는 없다. 당신이 알고 사랑하고 있는 그 사람은 당신의 뇌리에 어떤 사람이라고 입력이 되어 있는 그 대상이지 실제는 아니라는 말을 거듭 하고 싶다.

모니카는 아들이 기적적으로 회복되어 오게 되었을 때 사랑은 다시 친아들에게로 가게 되지만 데이비드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는 데이비드에 부착이 되었던 사랑이 바로 거둬들이지 못했던 것이지, 로봇인 데이비드의 존재자체를 사랑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보인다. 데이비드를 숲에 버릴 때 모니키가 슬펐던 것도 자신이 사랑한 추억을 잊어야 하는 슬픔인가, 동정심인가, 혹시나 조금이라도 데이비드 자체를 사랑한 것에 대한 상실감과 연민이 있었을까 궁금하다.

-당신에게 하루만의 시간이 최후로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데이비드가 바다에 빠진 후 2000년이 지나고 외계인들이 데이비드를 재생시키는 영화의 후반부는 내가 깊은 인상을 주었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데이비드가 2천년을 기다린 사랑은 불완전했다. 외계인은 데이비드에게 묻어있던 어머니 모니카의 머리카락 한 올에 있는 유전자로 모니카를 재생시켰으나 그 수명이 단 하루이다. 데이비드가 어머니를 매일 보기위해서는 모니키가 매일 아침 만들어져야 한다. 어머니와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잠이 들 때 데이비드는 어머니를 이별해야 한다. 내일 볼 수 있으나 어머니는 오늘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 자신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재생을 원할 것인가? 어머니가 원치않을 것으로 데이비드가 믿는다면 어머니와 함께 다시는 깨지 않을 영원한 잠을 바랄 것이다. 어머니 옆에 누워 행복한 표정으로 어머니의 잠드는 모습을 바라보는 데이비드의 슬픈 눈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당신에게 하루만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럴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이외에 다른 의미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것을, 주어진 삶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시간이 우리에게 무한정 자비롭게 주어질 것처럼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나머지 삶은 딱 하루뿐이다. 지금 현재의 하루,하루가 연속되는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과거와 내일은 없다.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하여 현재를 희생하는 일은 있어서 안된다. 삶은 지금(Now), 여기(Here) 이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간과하고 있는 이 사실을 항상 간직하고 있다면 오늘 내가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이 영화는 ...
= 데이비드의 역할을 하였던 어린 배우, 할리 조엘 오스몬트의 징그럽도록 너무 훌륭한 연기가 이 영화의 압권이다. 피노키오 동화처럼 마법으로 사람이 되면 엄마가 다시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을까 라고 믿는 순진하고 간절한 눈빛과 엄마와 같이 잠드는 행복한 슬픈 눈빛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스탠리큐브릭이 많은 애정을 가졌지만 자신이 만들지 않고 스필버그에게 감독을 꼭 부탁한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이 영화는 사랑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미래의 로봇을 소재로 하여 휴머니즘이 짙은 스필버그 특유의 칼라를 기대했을 것은 틀림없다. 영화가 개봉된 후 호평과 혹평으로 양극단적인 평가를 받으며 흥행에서도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감독이 이 아이를 캐스팅했다는 것만으로 다소 부족한 부분이 다 채워졌다고 한다면 지나친 평가일까?

=끝맺는 글
터미네이터는 사랑에 대한 영웅적인 자기희생적 실천으로 인류를 구원하였고, 데이비드는 2천년을 포기하지 않는 사랑에 대한 갈구와 실천으로 자신을 구원하였다. 자신만 구원하였을까? 지구가 멸명한 뒤 나타난 존재는(외계인) 데이비드의 간절한 사랑을 알고 이 사랑이야 말로 인간이 다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라고 인정하는 것 같은데 마치 신(God)처럼 데이비드의 소망을 이뤄준다. 빙하기가 온 것이 인간들의 책임이므로 이 존재들이 다시 인류를 소생시켜 준다면 인류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확신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다. 그렇다면 그 공은 데이비드에게 돌아가야 하므로 감정이 있는 로봇은 인류를 구원한 것이다. 인간들이 사랑을 주고 받으며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길 때까지라는 유효기간이 있지만 말이다.
0
0

게시물수정

게시물 수정을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댓글삭제게시물삭제

게시물 삭제를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